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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헬렌 Q'의 성(性) 이야기 4편 '조선 왕실의 스캔들과 성풍속'

스타트업엔 2023. 6. 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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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정종의 궁녀와 사통한 내시, 왕자의 첩과도 간통하여 참수되다
공신들이 쟁탈전 벌인 기생을 후궁으로 삼은 태종
조선 후기 속담 ‘열녀전列女傳 끼고 서방질하기’

◇ 2대 정종의 궁녀와 사통한 내시, 왕자의 첩과도 간통하여 참수되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한 때는 1392년.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조선 초기에 왕족과 궁녀, 내시, 양반들 사이에 간통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먼저 조선 왕실의 섹스 스캔들을 보면 도덕이니 윤리니 체면 같은 것은 안眼 중에도 없었다. 그중에서 궁녀와 내시의 사통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조선 초의 내시內侍들 중에는 거세되지 않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통정通情 사건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궁궐은 어떤 의미에서는 감옥과 같아 욕망이 유폐된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태종실록』에는 내시 정사징이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의 첩과 간통하였고 정종을 섬기던 궁녀 기매와 간통하여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2대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였다. 내시 정사징은 정종과 방간과 속칭 ‘구멍동서’가 된 셈이었다. 왕실의 권위는 개똥밭에 굴러떨어진 꼴이었다.

 

궁녀는 왕의 소유물이자 여자에 속하였으니 왕 이외 남자와 사통하면 참수斬首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기매는 정종의 아이를 가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태종 이방원

환자宦者 정사징鄭思澄을 베었다. 정사징은 고려 공양왕 때부터 환자宦者 같지 않다는 말이 있었는데, 또 회안 대군(방간)의 첩을 간통하였고, 인덕궁仁德宮을 섬기면서 시녀 기매其每를 간음하였다. 기매는 상왕上王의 본궁本宮 종婢이었고 상왕이 알고 기매를 내치니, 정사징이 도망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붙잡히자 곧 베었다. 의금부 제조에서 기매를 아울러 베자고 청하니, 임금이, “기매는 상왕에게서 아이를 배어 자식을 낳았으니 차마 못 하겠다.” 하였다.  - 『태종실록』 17년 8월 8일

태조 이성계

◇ 공신들이 쟁탈전 벌인 기생을 후궁으로 삼은 태종

 

태종 때 경북 보천의 관기官妓 가희아는 미모도 뛰어나고 가무를 잘하여 궁중 연희가 있으면 한양으로 올라와 연희에 참석하였다. 그러다 황상이 기생 가희아可喜兒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는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운 늙은 공신이었다. 위화도 회군(1388년)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위화도 회군

그런데 어느 날 연희가 끝나고 황상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가희아를 김우가 부하들을 시켜 납치하려다 실패하였다. 김우는 태종(이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그러면 김우는 왜 원로대신인 황상의 첩을 납치하려던 것일까?

 

사실 가희아와 먼저 정을 통한 사람은 김우였다. 속된 말로 잠자리 족보로 따지면 김우가 형님인 셈이었다. 김우의 부하는 밤에 황상의 집을 포위하고 다음날 청진동(조선시대 수진방)에 말을 타고 가던 가희아를 발견하고 쫓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황상도 부하들과 함께 쫓아가서 백주 대낮에 기생 한 명 때문에 대활극을 벌였다. 저잣거리에 소문이 나고 사헌부(司憲府: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기관)에서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결론은 김우에게 죄를 엄하게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우가 병사들을 시켜 밤중에 남의 집을 포위하고, 그 기생첩을 강탈하여, 대낮에 조로(朝路)에서 떼를 지어 난동을 부리기에 이르렀으니...” 그런데 태종의 판결이 너무나 편파적이었다.

 

“황상은 파직시키고 가희아는 장 80대를 수속(收贖: 돈으로 대신 내는 것) 하게 하고 김우는 공신이니 거론하지 말라” 황상은 아버지 태조의 공신이고 김우는 자기의 오른팔과 같은 공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가희아는 돈을 내고 풀려나 궁중 무희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2년 뒤 조정 대신들이 경악할 사건이 발생하였다. 태종이 가희아를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다.

 

홍 씨를 혜선옹주惠善翁主로 삼았으니, 보천의 기생 가희아可喜兒였는데, 처음에 가무를 잘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얻었었다. -『태종실록』 14년 1월 13일 자

 

조선에서 후궁이 낳은 딸을 옹주라 불렀는데 조선 초에는 고려의 유습이 남아 있어 후궁을 옹주라 불렀다. 이성계의 후궁이었던 김해 출신의 기생 칠점선七點仙도 화의옹주和義翁主로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말에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미색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기생 1명을 두고 공신들끼리 임금이 사는 궁과 가까운 거리에서 격투전을 벌였는데, 죄를 더 지은 자는 아예 논하지 말라 하고 억울한 입장이었던 아버지의 공신은 내치고 결국 임금이 그 기생을 후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희아는 젊은 공신과 정을 통한 후 지위가 더 높은 늙은 공신의 첩이 되었다 임금의 여자가 되었으니 천한 기생 신분에서 내명부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인생 로또가 따로 없었다. 간단히 보면 인생에서 환승換乘을 잘한 여성일 수도 있지만 기생 신분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조선 초까지도 성 풍습이 고려와 크게 다르지 않아 유교의 인륜이니 도덕이니 하는 이념은 정착되지 못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1대 중종 때까지도 그 풍속이 변하지 않았음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근래 풍속이 아름답지 않아서, 종친, 사대부가 서로 처첩妻妾을 훔쳐 음란한 풍속이 지극히 성행한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의 처첩을 혹 그 부모를 꾀거나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을 범하여 핍박하여 간통하는 자도 이따금 있으므로, 이미 헌부憲府를 시켜 이문移文하였으나 관찰사가 된 자가 심상하게 여기니, 관찰사에게 교시를 내려 그 궁벽한 마을에도 서로 처첩을 훔치는 자가 있거든 추문推問하여 알아내어 계문啓聞하게 해야 한다.  - 『중종실록』 23년 11월 4일 자

 

위 내용은 중종 때 간통한 자의 죄를 따지라는 왕명을 내린 것으로 당시의 풍속을 언급하고 있는데 때는 1528년이니까 조선 건국 후 130년이 지나도록 유교의 이념은 뿌리내리지 못했고 성 풍속은 여전히 고려의 자유분방한 것을 따르고 있었다.

열녀전(列女傳)

◇ 조선 후기 속담 ‘열녀전(列女傳) 끼고 서방질하기’

 

조선 후기에 여성들에게 교화의 목적으로 보급되었던 「열녀전」도 속담에서는 ‘열녀전 끼고 서방질하기’라고 할 정도였으니 풍속 중에서도 성에 대한 규제만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억압할수록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구 또한 그만큼 강할뿐더러 성적 욕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욕망이란 어떠한 부정과 금지도 무시하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리비도 Libido(성본능)처럼 순수한 에너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도저히 채울 수 없는 뻥 뚫린 구멍이나 목마름 또는 부러움 등의 결핍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영화 <님포매니악Nymphomaniac>에서 주인공 조는 이렇게 반문한다. “파도를 백사장에 어떻게 가두어 놓겠어요?” 성의 욕망을 파도와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전 세계가 자본주의의 텐트 속에서 끝없이 욕망을 확장시키는 오늘날 조선 초 왕실의 섹스 스캔들은 인간의 욕망, 그중에서도 참을 수 없다는 성性이 무엇이길래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의 성 풍속과 의식은 건강한가? 자문해 본다.

글/사진=임해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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