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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헬렌 Q'의 성(性) 이야기 3편 '고려 왕의 남자, 천추태후의 남자가 거란 전쟁 유발자?'

스타트업엔 2023. 6. 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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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신라의 성 풍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쌍화점雙花店>이나 <만전춘滿殿春>이라는 고려속요 등을 통해 당시의 성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남녀 혼욕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ʻ경합이리輕合易離ʼ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을 정도로 고려인들의 성 풍습도 자유분방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원 나잇 스탠드’가 이미 그때부터 있었던 것일까? 

 

한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은 지방 호족들과 혼인관계로 동맹을 맺어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 근친혼의 길을 열어 놓았다.  왕건의 넷째 아들 왕소는 이복 여동생 황보 씨와 결혼하고 두 번째 부인은 조카였다.  이렇듯 고려의 왕실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근친혼과 동성애가 계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7대 목종은 유행간이라는 신하와 동성애를 한 내용이 나온다. 

 

유행간庾行簡은 그 생김새가 아름다워서 목종이 특히 그를 사랑해 용양(龍陽,남색)의 관계를 맺었다. 합문사인閤門舍人으로 벼락출세시켜 놓고 왕이 교지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유행간에게 먼저 물은 다음에 시행하였다. 이 때문에 총애를 믿고 교만하게 굴면서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제멋대로 부리니 측근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대우하였다. - 『고려사』 권36, 「열전」 폐행유행간

 

문제는 왕이 신하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능력과 관계없이 높은 벼슬을 주고 국사를 ‘침실 파트너’에게 일일이 물어보았다니 오히려 신하가 임금을 쥐락펴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배겟머리 송사’로 인해 목종은 왕 노릇도 못하고 모후에게 신경 쓰지도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목숨을 잃었다.

 

국사國事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공사共私를 구분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 역사에서 나라가 망할 때 보이는 공통된 현상이 사적인 친분으로 벼슬을 나눠주다 보니 나라 꼴은 개판되고 반란과 혁명이 일어았던 것이다.

 

목종이 유행간과 사랑놀이에 멘탈이 가출할 당시 고려를 통틀어 최고의 섹스 스캔들이 터지고 말았다. 7대 목종의 모후母后이자 5대 경종의 후비였고 6대 성종의 여동생이었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막장드라마의 여주인공이었다. 

 

고려 최초로 섭정을 한 천추태후는 8대 현종의 이모이기도 했다. 천추태후는 대비가 되어 목종을 도와 국정을 펼치는 대신 외가 쪽 먼 친척인 김치양과 사통私通을 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되자 왕으로 세우려는 역심逆心을 품었던 것이다.

 

김치양은 동주同州 사람이며 천추 태후千秋太后 황보皇甫씨의 외족外族이었는데 성정이 간교하고 성욕이 몹시 강했다. 김치양은 일찍이 머리털을 깎고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千秋宮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成宗이 그것을 확인하고 곤장 쳐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목종이 항상 그를 내보내고자 하였으나 모친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고 단행하지 못하였다. 후 태후가 아들을 낳았는바 그것은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것이었다. - 『고려사』 127권, 「열전」 40, 반역 김치양
 
그런데 이 소문이 목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목종은 당시 평안도 지역을 관리하던 강조康兆에게 빨리 개경으로 돌아와 왕궁을 지키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질풍노도처럼 개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먼저 김치양과 아들은 황천길로 보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유배 보낸 후 목종을 죽여버렸고 이것이 소위 ‘강조의 변’이라는 사건이다.

 

그리고 대량군을 왕으로 세웠으니 그가 8대 현종(顯宗,991~1031)이다. 현종은 천추태후의 여동생 헌정왕후의 아들인데 아비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 왕욱이었으니 숙부와 조카가 통정하여 낳은 아들이었다. 왕욱은 목종과 현종에게는 외조부였고 현종에게는 아버지인 관계였다.

 

천추태후의 사통 사건이 강조의 변을 일으키고 결국 제2차 거란*의 침입을 유발시켰던 것이다.

 

*제2차 거란 침입은 고려의 정변 소식을 접한 성종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현종 1) 11월에 직접 40만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 서북부에 침입해온 전쟁

 

한편 고려 말 동성애로 유명한 왕은 드라마나 영화에 주인공으로 여러 번 등장하였다. 바로 공민왕이었다. 

영화 '쌍화점'의 한장면

항상 자신을 부인 모양으로 화장했다. 먼저 젊은 여종을 방안에 불러들여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고 김흥경과 홍륜 등을 불러들여서 난잡한 행동을 하게 해놓고, 왕은 곁방에서 문틈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홍륜 등을 침실로 불러들여서 마치 남녀 사이와 같이 자기에게 음행을 하게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십 명을 바꾸고서야 그쳤다. -『고려사』 권43 「세가」 공민왕 21년

 

한때 원나라로부터 고려의 주권을 찾기 위해 개혁 정치를 펼치기도 했지만 원나라에서 온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남색男色에 빠졌고 결국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민왕은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고 돌아와 왕비를 의지하며 살다가 공주가 죽자 슬픔과 외로움으로 쾌락의 늪 속에 도망쳤지만 왕의 자리를 지키려면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퀘스트 Quest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때 동성애에 대한 기록 중 눈에 띄는 것은 문인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에 나타난 한시漢詩로 그 내용은 고승高僧과 미모와 재주를 가진 소년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이 개벽하매 음과 양이 생기고...
침실에 이불을 함께 하니 정의가 진실로 도탑고
서로 사랑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5연)

 

이규보와 교유가 깊었던 경조景照라고 하는 당대 고승이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도 물리쳤는데 박 씨 소년을 만나 사랑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한편 성 풍속은 고려 왕실 뿐 아니라 일반 저잣거리에서도 자유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려속요高麗俗謠 <쌍화점雙花店>은 충렬왕 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둣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나고 들면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답답(난잡) 한 곳이 없다

삼장사에 불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절밖에 나고 들면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답답(난잡)한 곳이 없다

화자話者인 여자에게 만두가게 주인인 회회아비(이슬람 상인)부터 절의 주지스님, 용龍(왕족)이 손목을 잡으며 유혹을 하니까 그 얘기를 듣고 자기도 그곳에 가 보겠다는 내용이다. 결론은 자신도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성을 즐기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 얼핏 생각하기에 그 당시에 이슬람 상인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이슬람인(色目人)들이 개경 인근 지역에 마을을 이뤄 집단 거주하면서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슬람교 사원 격인 예궁(禮宮)에서 일상 예배를 열었다고 한다. 원나라에 왔던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에 귀화해 살았고 덕수德水 장씨張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쌍화점>은 고려의 자유분방한 성풍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타락한 불교와 왕실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쌍화점은 고려 시대 당시 쌍화를 파는 가게로 만두가게를 말한다. 그중 이슬람 상인과 스님이 유혹하는 내용을 소개해 본다. 

 

한편 고려속요高麗俗謠 중 대표적인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꼽히는<만전춘滿殿春>의 일부를 보면

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소서, 더디 새소서.

 

<만전춘滿殿春>은 봄이 가득한 전각殿閣의 이별 노래라는 뜻이다. 얼어 죽더라도 밤이 더디 새기를 바란다는 구절은 남녀의 색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얼다’라는 말은 남녀가 얼우어지다 즉 남녀가 섹스를 한다는 뜻도 있으니 이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또는 속된 말로 얼어서 동태凍太가 되더라도 정사情死하고 싶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고려속요는 성애에 대한 정념情念을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어 고려인의 성관념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와 고려 시대의 성 풍속이 문란하다고 단정 짓는 것은 다시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성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각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글/사진=임해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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