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을 의식하는 사람은 드물다
2019년 4월에 있었던 일이다. 개명신청을 하러 지방법원을 방문했다. 분주한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민원업무를 처리하는 곳을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문의드릴 게 있어서..."
"다른 곳에 가보세요."
"네?"
"여긴 오는 데가 아니에요."
당시 양복에 넥타이를 착용하고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영업사원의 옷차림이었다. 물건을 팔러 온 사람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잠시 직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선생님. 저 개명신청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벌떡 일어나서 내가 준비해야 할 서류를 준비해주었다.
기준, 혹은 표준을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주어진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표준은 누구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표준은 고정관념과도 같다. 개명신청하러 온 사람이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개 영업사원으로 오해하고 내쫓으려고 한 행동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협상에 있어서 표준을 제시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사용하는 태블릿PC가 고장나서 S전자 서비스센터에 A/S를 신청하러 간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회사에서 업무 중에 잠시 나온 상황이었기에 2시까지 복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는 동안 사소한 언쟁이 불거졌다. 주차하고 서비스 센터로 뛰어가고 있는데 주차장 직원이 주차를 삐뚤게 했다고 짜증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중주차를 한 것도 아니고, 두자리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라 주차선을 제대로 못보고 주차를 한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어이 아저씨! 다시 주차하고 가세요!"
"금방 맡기고 내려올게요. 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젊은 사람이 금방 주차하고 가면 되지, 뭐 그리 급해?"
"제가 바빠서 그렇습니다. 잠깐 맡기고 오면 되는데 좀 봐주면 안됩니까?"
"당신 편의 봐주면 다른 사람들도 편의 봐줘야 되잖아. 잠깐 시동 걸고 주차하고 가면 되지!"
할 수 없이 다시 주차를 하고 서비스센터에서 업무를 보고 나왔지만 속상한 게 가시지 않았다. 큰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잘 몰라서 그런건데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차를 타고 나가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제가 실수한 건 인정합니다. 주차를 제대로 못한 건 제 잘못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할 게 있습니다. 선생님은 S전자의 얼굴입니다. 제가 선생님처럼 불친절한 직원 때문에 앞으로 S전자에서 제품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좀 전에 큰소리치던 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지못한 듯이 "알았으니 조심히 가시오."하고 이야기했다. 썩 마음에 드는 대꾸는 아니었지만, 우중충한 날씨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그 날은 그에게도 별로 좋은 날씨는 아니었을 것이다.
표준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본질적 가치를 기준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표준을 어기는 경우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이 가진 행위의 도덕적 이미지가 실추되기 때문에 스스로 거짓말쟁이, 사기꾼, 불친절한 직원, 혹은 그런 기업이라는 오점을 남기게 만든다. 표준을 제시함으로써 협상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며, 또 가장 정확한 방법이기도 하다.
언젠가 몸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방문한 적이 있다. 데스크에 두 명의 여직원이 앉아 있었는데 다가가서 물었다.
"안녕하세요. 진료를 좀 받으러 왔습니다."
"이거 적어주세요." 앉아 있던 여직원은 내 눈도 마주치지 않고 종이를 하나 휙 내밀었다.
"다 적으시면 주세요." 내가 다 적고 내밀자 역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앉아계세요."
누가 들어도 불친절하다고 느낄 만큼 딱딱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기분이 팍 상해서 "이 병원에 여직원은 뭐 이리 불친절해? 직원 교육을 이따위로 시키고 있어! 병원이 여기밖에 없어?" 하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용기가 없었다. 어떻게 대꾸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함을 치는 대신 한마디 툭 던졌다.
"뭐 기분 나쁜 일 있으세요? 표정이 되게 안 좋으시네요."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여직원은 깜짝 놀라며 "아, 아닙니다 고객님.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며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성함이 전.준.우 고객님 이시구요, 휴대폰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아~네~많이 불편하시겠어요. 잠시만 앉아계시면 바로 진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 기억이 맞다면, 진료를 마치고 나갈 때 90도로 인사를 했던 것 같다. 환자를 치료한다는 병원 특유의 깔끔하고 깨끗한 이미지, 그러므로 당연히 친절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표준 때문에 그 여직원은 불친절한 직원에서 졸지에 '과친절'한 직원이 되어버렸다.
◇표준의 의미와 가치
표준은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표준을 어기는 사람과 조직은 오점을 남기는 위치로 전락한다. 절대적 가치를 가진 무엇, 혹은 거창한 철학을 이야기할 것도 없이 표준만 이야기하면 소소한 협상에 있어서 대부분의 상황은 내 편으로 기울게 되어 있다. 기업이나 개인이 가진, 혹은 스스로 제시하는 표준은 그 자신의 기준 안에서 가장 완벽하고 완전한 존중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표준을 제시할 때는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표준을 제시하는 협상에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는 고스란히 상대방의 것이라는 말이다. 올바른 협상은 대화의 물꼬를 부드럽게, 상황을 유연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지만 반면에 융통성이 없고 딱딱한 사람 혹은 개념(concept)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도 한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다닌 적이 있다. 젊은 학생들이 주로 방문하는 레스토랑인데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먼, 카페와 레스토랑의 언저리쯤 되는 곳이었다. 예쁜 아가씨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기에 나로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주말 아르바이트이기도 했다.
당시 사장님은 손님이 돈까스를 주문하면 돈까스를 한 번 리필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해주었는데, 의외로 리필해서 먹는 손님은 별로 없었다. 손님들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이었는데, 아무래도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음식을 먹는 게 익숙한 나이대이므로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기억나는 손님이 한 명 있다. 그런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꼭 리필을 하는 여자손님이었다.
일단 그 여자손님이 들어오는 순간 사장님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살짝 내리깔며 "하아..."하고 한숨을 쉬고 난 뒤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사장이 뭐 저러나, 싶었지만 나중엔 사장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내 돈 들어가는 게 아니었으므로 리필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태도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리필하면서 꼭 한마디씩 하는 태도였다. 그 태도 때문에 요리하는 주방장, 사장님, 서빙하는 나까지 난감해졌다.
"리필하니까 처음이랑 소스맛이 다른데요?"
"이건 지난번 리필한 것보다 좀 작은 것 같아요."
"약간 탄 맛이 나는데요."
사장님 입장에서는 그런 진상도 없었을 것이다.
◇접근방식의 차이
앞에서도 꾸준히 이야기하고 있듯, 협상은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다. 원만한 상황해결이 목적이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면서까지 협상을 성공한다면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협상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과 지혜롭게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지, 갑이 되기 위한 기술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잣대, 기준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표준을 어기는 경우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이 가진 행위의 도덕적 이미지가 실추'되기 때문에 표준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어떤가?
남다른 감자탕은 가맹점을 형제점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주)보하라 그룹의 대표 프랜차이즈 가맹점이다. (주)보하라 그룹의 CEO 이정열 대표는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고 3년만에 100억대 매출의 회사를 만든 성공한 사업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고객의 건강을 위한 요리를 하는 감자탕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나는 남다른 감자탕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의 저서만 읽어봤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남다른 감자탕에 대해 아주 큰 애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장사,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써 지켜야 하는 표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두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다른 감자탕에서는 최선을 다해 요리를 한다. 고객의 건강을 위해 가장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요리한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하진 않다. 대신 '먹어보고 맛이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표준을 정확하게 지키는 음식점'이라는 이미지를 갖기 마련이고 별 불평 없이 다녀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손님 하나가 와서 국물까지 싹 비우고는 "맛도 없고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겠다."고 한 뒤에 그냥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잣대, 자신의 기준을 운운한다는 것은 '표준의 가치' 운운하는 것을 떠나 올바른 정신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먼저 가져볼 만한 일이다. 표준을 제시하는 협상방법은 그 나름대로 좋은 기술이지만 중요한 포인트, 상대방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 협상에 있어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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