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방재희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⑫

스타트업엔 2021. 4. 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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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질 무렵

잔인한 달, 4월이 돌아왔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평온한 겨울의 땅에서 생명을 움틔우는 자체가 잔인하다고 했지만 제주의 4월은 동백꽃의 낙화처럼 속절없이 툭툭 떨어졌던 목숨을 되새겨야하는 고통의 달이다.

 

본디 제주에서는 동백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도둑이 든다고 믿어서 집안에 심지 않았다. 또한 꽃잎이 지는 것이 아니라 꽃송이가 꼭지채 쑥 빠져 떨어지는 것이 죽음을 연상시켜 불길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고는 송이째 툭 떨어진 동백의 낙화(사진=방재희 기자)

불의의 사고를 춘사(椿事)라고 하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본에서는 동백을 춘수락(椿首落)이라고 부른다.

 

동백꽃이 제주 4.3항쟁의 상징이 된 데는 낙화의 모양처럼 불의의 사건으로[춘사(椿事)] 이유없이 스러져간 민중의 덧없는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동백이 억울하게 죽은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서이기도 하다.

제주 4.3평화공원의 동백꽃 (출처=네이버 블로그)

동백숲이 우거진 바닷가에서는 사당을 자주 만날 수 있다. 무당이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못한 넋을 위로하는 굿을 할 때 동백나무 가지에 떡을 매단다. 생전에 친숙하던 동백꽃을 통해 죽은자의 넋이 돌아오기를 바라서다.

 

제주민들에게 동백꽃이 가슴아픈 역사를 담고있기는 하지만 동백나무는 10월부터 4월까지 한해의 절반을 꽃피우는 쓸모가 많은 나무다. 

바닷가 동백숲에 자리한 사당과 금줄(사진=방재희 기자)

“해홍화는 신라국에서 자라는데 꽃이 매우 선명하다.(海紅花 出新羅國 甚鮮)”라고 읊은 중국의 시선 이태백의 오랜 기록처럼 동백은 일찍부터 이땅에서 피고 졌다. 바닷가에 피는 붉은 꽃, 해홍화라는 이름처럼 동백은 남쪽지방 해안이나 섬지방에 자리잡고 붉게 피어 푸른 바다색과 대조를 이룬다. 

해홍화, 완도 바닷가에 핀 붉은 동백꽃(사진=방재희 기자)

동백나무 한그루가 중형자동차 3대가 1년간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데다가, 동백숲은 강한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바람도 공해도 막아주는 고마운 나무다. 동백(冬柏) 은 겨울에 피는 꽃이라는 의미를 담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한자다. 

전남 완도 청해진의 동백 방풍숲(사진=방재희 기자)

동백은 왜 겨울에 꽃을 피울까?

동백은 조매화(鳥媒花)다. 벌과 나비대신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준다. 동박새를 붉은 색으로 꼬시려면 경쟁자가 없는 겨울철이 맞춤하다. 동백꽃의 긴 몸통 끝에 혀를 대보면 달콤하다. 동박새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 꿀이다. 동백은 그외에도 산다화(山茶花)라는 별명이 있다. 

동백꽃 수분을 돕는 동박새. 몸이 작은데다 잎을 닮은 초록색이어서 새소리는 들려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출처=한라일보)

차나무과에 속하는 동백의 잎을 녹차대용으로 우려마시기도 하고, 꽃이 피기전 봉우리를 말려서 약으로 사용하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산다(山茶)'와 관련된 글이다. 산다는 남쪽지방에서 나는 아름다운 나무로 『유양잡조』라는 책에는 “산다는 키가 한길이 넘고 꽃의 크기가 한 치를 넘으며 색깔은 붉고 12월에 핀다”라고 되어 있다. 『본초강목』에는 “산다는 남쪽에 나고 잎은 차나무와 매우 닳았고 두터우며 한겨울에 꽃이 핀다”라고 하였다. 소식의 시에 “불꽃같은 붉은 꽃이 눈속에서 핀다”라고 하였다 내가 강진에 있을 때 다산에 많은 산다를 심는 것을 보았다. 그 화품은 적으나 잎은 겨울에도 푸르고 꽃이 많이 달린다.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바르면 윤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므로 부인들이 소중히 여긴다. 정말 훌륭한 꽃나무이다. 정약용, 「산다(山茶)」, 『잡찬집(雜纂集)』. 제24권 아언각비(雅言覺非) 권1)

 

경기도 두물머리가 고향인 다산 정약용은 귀양지 전남 강진에서 처음 만난 동백나무를 귀하게 여겨서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선춘화(先春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이 유배지의 추운 겨울, 따뜻한 벗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였을까.

열매맺은 흔적과 열매맺을 동백이 함께 어우러지다(사진=방재희 기자)

잎이면 잎, 꽃이면 꽃,나무면 나무, 동백은 버릴게 없다. 나무재질이 균질하고 견고하여 나무방망이나 악기, 다식판을 만들때 주로 사용된다. 무엇보다 동백의 쓰임은 열매에서 짠 기름에서 빛을 발한다. 변하지도 굳지도 날아가지도 않는 동백의 맑은 노랑색 기름은 예로 부터 삼단 같은 머릿결을 귀히 여기는 여인네의 머릿기름으로 사랑받았다. 또한 그을림이 적고 불길은 밝아 등유로도 최고였으며, 천식과 부스럼 치료에도 효과가 좋았다.

 

이런 동백의 북방한계선이 충남 서천 마량리의 천연기념물 169호 동백숲으로 충청 이북지역에서는 만날 수 없다.

천연기념물 169호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숲(사진=방재희 기자)

쪽동백나무, 개동백나무라는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듯 충청 이북지역에서는 동백을 대치할 나무를 찾아 아쉬움을 달랬다. 때죽나무꽃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나뭇가지에 조로록 달리는 쪽동백나무꽃은 어여쁘고 귀여운 꽃과 초여름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향긋함도 좋거니와 동백기름을 대신하는 열매의 쓰임은 더할나위 없다.

조로록 달린 쪽동백나무 꽃(사진=방재희 기자)

개동백나무는 생강나무를 말한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김유정 단편 <동백꽃> 중에서.

 

소작농의 아들인 나와 마름의 딸인 점순이의 풋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한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의 한부분이다. 노란색 동백꽃은 없다. 다만 동백이 자라지 않는 강원지방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부른다. 춘천이 고향인 김유정에게 동백은 생강나무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강원도 정선아리랑에 등장하는 올동백도 생강나무를 말한다.

화단에 핀 꽃자루가 긴 산수유꽃(사진=방재희 기자)

생강나무는 산수유와 비슷하게 생겼다.산수유는 일부러 심고 가꿔야하기에 가까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줄기가 지저분하고 꽃자루가 1cm정도로 길다.

 

반면 줄기가 초록색으로 매끈하고 꽃자루가 없어서 나뭇가지에 붙은 것처럼 보이는 생강나무는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자생식물이다. 생강나무는 잎과 꽃,줄기에서 생강냄새가 나서 붙은 이름으로 까만열매에서 짠 기름이 동백기름 대용으로 사용된다.

줄기에 껌딱지처럼 붙은 생강나무 꽃. 산에서 만날 수 있다(사진=방재희 기자)

그러니 <동백꽃>의 주인공 나와 점순이가 파묻힌 노란동백꽃 속은 흐드러진 생강나무 군락의 알싸하고 향긋한 생강 향기를 상상하면 되겠다.

 

올해 4.3항쟁 기념일 다음날은 기독교가 지키는 부활절이었다. 예수가 속절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속에 빠졌지만, 3일후의 부활로 모든 것을 만회하고 오히려 더하기가 되었다.

 

4월은 남녘 동백숲에 붉은 융단이 화려한 시기다.

 

춘수락이라는 슬픈 별명을 지니고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 동백이 마련한 레드카펫은 죽음의 쓸쓸함이나 처절함보다는 생명력 넘치는 화려함으로 부활의 생명력을 담았다.

 

동백 융단의 끝자락에서는  모든 생명력이 왕성한 계절이 시작될 것이고, 그 생명들이 움츠러들 즈음에는 위로와 치유의 동백꽃과의 또다른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뒷뜰에서 만난 레드카펫을 연상시키는 동백융단(사진=방재희 기자)

 

스타트업엔 방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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