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중화
코로나19로 움츠려 유독 길게 느껴지던 겨울,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매화의 개화로 시작되었다. 한겨울에 피는 동매(冬梅),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고 설중매(雪中梅)라는 이름처럼 매화가 지금의 고난 중에 마치 희망의 전령사가 된 것마냥 반갑다.
'귀로 듣는 향기'라는 표현처럼 아직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은은히 퍼지는 매화의 향기는 그 모습만큼이나 고졸하다.
제주에도 설중화로 불리는 꽃이 있다. 제주에 자생하는 수선화가 그 주인공이다. 여름을 알뿌리 형태로 흙 속에서 나고 겨울에 싹을 틔워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수선화는 이맘때가 절정이다.
검은 현무암 돌담을 배경으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곳곳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선화의 모습에, 꽃이 발하는 진한 향에 탄성이 절로 난다.
제주 수선화의 대표 선수는 둘이다.
흰색 꽃잎이 백옥 받침처럼 금빛 술잔을 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금잔옥대'와 꽃이 크고 속 꽃잎이 마늘 뿌리처럼 생긴 모양을 제주 방언으로 옮긴 '몰마농꽃'이 그것이다.
제주 수선화는 추사 김정희가 사랑한 꽃이다.
그는 1840년, 55세의 나이로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에 9년간 유배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제주 수선화를 만났다. 추사가 24살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접한 후로 중국 사신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얻던 꽃이 우리 땅에 지천이었던 것.
책을 사랑했던 정조가 유행시킨 책가도에 사대부들은 당시 구하기 힘들던 중국 수입 명품을 자랑삼아 그려 넣어 과시욕을 보여줬는데, 여기에 등장할 정도로 수선화는 귀한 꽃이었다.
이런 귀한 꽃이 지천에 피는데,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는 아쉬움이 지인 권돈인에게 쓴 편지글에 나타나있다.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절강성 이남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는 촌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서도 이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는데, 화품(花品)이 대단히 커서 한 가지에 많게는 10여 송이에 꽃받침이 8~9개, 5~6개에 이릅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께부터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토착민들은 수선화가 귀한 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함부로 짓밟아버리며, 또한 수선화가 보리밭에 잡초처럼 많이 나기 때문에 시골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보자마자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파내고 파내도 다시 나기 때문에 이를 원수 보듯 하고 있으니, 수선화가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귀양살이하는 처지지만 명문가 집안에서 자라 30대에 문과에 급제하고 20여 년을 승승장구했던 금수저 문인 김정희는 소위 먹물이었다.
화산암 지대 척박한 땅에서도 어떻게든 먹거리를 일궈야 하는 제주도민들에게는 향기 좋고 꽃 곱다 하나 먹지도 못할 풀이 귀한 흙을 축내니 수선화를 뽑아버렸을 텐데, 추사의 눈에는 그게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추사의 수선화 사랑은 보물 547호, 김정희 종가의 유물 중 7언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
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신선 너로구나
푸른 바다 파란 하늘 한 송이 환한 얼굴
신선의 인연 그득하여 끝내 아낌이 없네
호미 끝에 베어 던져진 예사로운 너를
밝은 창 맑은 책상 사이에 두고 공양하노라
매화는 사군자에서도 첫 번째로 손꼽힐 정도로 고고하나 뜰 밖을 벗어날 수 없다는 구절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그것이 영원한 제자리인 듯 여긴 자신이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호미 끝에 베어 던져진 수선화처럼 버림받고 절해고도 유배지에서 희망도 없는 매일을 보내는 처지지만 물가의 신선[水仙], 수선화처럼 오히려 권력의 암투에서 달관한 해탈신선으로 거듭나고 싶은 추사의 마음이 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서양의 수선화는 나르시시즘의 대명사다. 미소년 나르시스는 연못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속에 빠져 죽었는데, 그곳에서 수선화가 피었다고 한다.
그래서 속명은 나르키수스(Narcissus)가 되었고, 꽃말은 '자기주의(自己主義)' 또는 '자기애(自己愛)'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네가 수선화의 아름다움을 추운 겨울을 이기고 꽃피우는 고고함과 봄기운을 부르는 향기에서 찾는 것과는 결이 좀 다르다.
반면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는 "두 조각의 빵이 있는 자는 그 한 조각을 수선화와 맞바꿔라. 빵은 몸에 필요하나, 수선화는 마음에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마도 이 구절은 온라인 졸업과 소비침체로 위축된 화훼농가에게는 반가운 마케팅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밥 한번 먹을 비용으로 수선화 화분을 집에 들이고 무하마드는 왜 수선화가 마음에 필요하다고 말했는지 마주해보자. 굳이 거창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그 화사함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당장 꽃 시장으로 길을 잡아야겠다.
스타트업엔 방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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