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준우 칼럼] '교육이 죽은 사회가 우리에게 알리는 경종'

스타트업엔 2021. 10. 1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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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스트레스

 

나는 교육이 가진 가치에 대해 남다른 철학을 갖고 있다. 교육기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온 터라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단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울적한 10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나는, 내 얼굴이 무척 싫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독히 못생겨서다. 뽀얗고 눈망울이 큰 아이들과 달리, 내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눈만 말똥말똥했다. 예쁘게 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난 왜 이렇게 못생겼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속상해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파마를 했다. 어쩌면 나의 못생긴 얼굴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내 별명은 라면이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지독히도 못생겼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침울했다. 어린 마음에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지만. 엄마에게 “엄마, 난 왜 이렇게 못 생겼어?”하고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우리 아들이 얼마나 잘생겼는데!”

 

전혀 힘이 되지 않는 말씀이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은 1991년이었다. 태어나 처음 달려본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한참 달리는데 옆에 아무도 없었다.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니 저만치 아이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계속 달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앞만 보고 달렸고, 1등을 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타고난 체력, 운동능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2학년이 되자 2등, 3학년이 되자 3등, 4학년이 되자 4등, 5학년 때는 5등, 6학년이 되어서는 꼴찌만 했다. 100미터 달리기, 오래 달리기를 하면 나는 항상 꼴찌였다.

 

낮아진 자존감은 폭식으로 이어졌고, 초등학교 4학년부터 비만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소위 말하는 찐따였다. 가무잡잡하고 못생긴 얼굴, 라면처럼 뒤엉킨 파마머리, 많이 먹어서 배만 나온, 자존감 낮은 초등학생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여자아이들은 없었다. 당시엔 자존감이 낮아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위험한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셈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 그들은 오래전 미국의 교육문화가 아닌 바로 나의 10대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959년 미국의 청소년들은 오늘날과는 달리 엄격한 학교 교육과 가정지도를 받아야만 했다. 그런 교육은 부유층 청소년일수록 더욱 심했다. 가정과 부모, 학교와 규칙 그리고 교장 선생의 봉건적이고도 억압적인 사고방식은 한창 웅지를 펼쳐야 할 청소년들에게는 숨통 막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소신대로 학과를 선택할 수 없을뿐더러 반항을 한다거나 말대꾸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 29p, 톰 슐만, 모아북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살이 빠지고 키가 크기 시작했다. 뭔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 마음에 '아프리카 쌔깜디'와 같은 단어는 나에게 상당한 상처가 되었는데, 점차 '아프리카 쌔깜디'에서 '구릿빛 피부를 가진 학생'이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살이 빠지면서 콧대가 세워졌고, 볼살이 빠지면서 눈매가 달라졌다. 쌍꺼풀 수술했냐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짙은 쌍꺼풀이 생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티격태격 싸우던 누나는 “야, 내 친구들이 니보고 김원준 닮았다더라.”라고 이야기했다. 1996년, 김원준은 한국의 최정상급 탑스타였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훌륭한 가수였다. 하지만 낮아진 자존감은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높아질 줄 몰랐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정상궤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키가 크고 늘씬한, 꽃보다 아름다운 여학생들이 주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여학생들이 내게 이성적인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추파를 던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잡을 줄 몰랐다. 추파였다는 것을 지레짐작하게 된 것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자연스러운 행동인지 알게 된 것도, 성인이 되고 난 뒤 한참이 지난 후였다.

◇교육자로서의 삶

 

나이가 들면서 학창 시절 나를 옭아매던 비만, 라면머리, 외모 스트레스, 그로 인한 낮은 자존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군에서 제대하고 난 뒤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동안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20대 중반부터 서른까지는 뮤지컬 배우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크고 작은 무대에서 활동해올 수 있었는데, 2,000명이 넘는 관객 앞에서도 떨지 않고 노래를 하며 연기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자존감과 상황에 지배받지 않는 담대함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글을 쓰고 사업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훈련을 통해, 나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교육자로서 삶을 살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책상 위에 올라서 있는 이유가 있다. 즉 뭔가 또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을 쓸 필요가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학생들은 어느덧 그 말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키팅의 그러한 행동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세계도 다르게 보인다는 키팅의 말에 학생들은 진심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은 믿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 113p, 톰 슐만, 모아북스

 

그렇게 나이가 들면서 제법 어른 소리를 듣다 보니, 안타깝게 흘려보낸 10대 시절이 떠올랐다.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낮은 자존감 때문에 용기가 없어서 놓친 여학생들,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혼자 가슴앓이만 하다가 끝내버린 10대 시절이 생각났다. 그 여학생들은 잘 살고 있을까?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때 함께 방황하던 친구들은 모두 잘 살고 있을까? 지나가버린 과거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인생이 너무너무 아깝다."

 

내가 쓴 첫 책의 제목은 [교육의 힘]이었다. 그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나는 단 한 번도 10대로 돌아가고 싶은 적이 없었다. 왕따, 학교폭력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고 얽힐 만한 일도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낮은 자존감을 이길 수 있는 힘,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마음을 괴롭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처리할 만한 마음의 힘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 제법 선생 노릇을 하게 되면서부터 마음의 힘을 키우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습관화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나와 같은 암울한 10대 시절을 보내고 있을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쓰고 싶었다. 책을 출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되었고,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읽게 된 [죽은 시인의 사회]는 10대 때 읽을 때와는 사뭇 느껴지는 바가 달랐다. 어느 순간, 어린 시절 봐온 부모님의 인생과 그때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나의 인생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나의 인생, 나의 10대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고, 또 존중하는 분들이다. 그분들의 인생이 없었다면 나와 누나의 인생도 없었을 것이고, 그분들의 노고와 수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음에 감사하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새삼스레 느끼고 있다. 반면에 어른이 되고 나니, 부모님의 삶이 애처로워 보일 때도 있었다. 낮은 자존감과 피해의식으로 흘려버린 10대. 그건 분명히 나의 문제였지만, 부모님의 연약한 부분이기도 했다.  

 

니일은 아직도 입 속으로 우물거릴 뿐이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 똑바로 아들을 바라보며 그로부터의 어떤 변명을 잔뜩 기다렸다. 순간 매우 기묘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어떤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을 스쳤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가 아니었다. 너도 말을 할 수 있느냐, 네 생각이 옳다고 판단한다면 확신을 가지고 주장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다. 아들한테 소신을 밝히도록 기회를 주고 싶어진 변화가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스친 것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애비한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다는 거냐?" 죽은 시인의 사회 113p, 톰 슐만, 모아북스

 

엄마와 아버지는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었다. 반면에 자존심과 고집은 상당히 강한 분들이었다. 부모님의 입에서, 마음에서, 긍정의 단어가 나온 기억이 내겐 별로 없다. 매사에 부정적인 분들이었고, 작은 일에도 한숨을 내쉬며 걱정을 하셨다. 어릴 때에는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부정적인 게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았고, 그렇게 행동해야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영향을 받으며 살지 않는가.

어린 시절 외모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폭식, 비만, 촌스러운 패션, 구닥다리 휴대폰, 낮은 학업성적, 별 볼 일 없는 지방대학교 졸업.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어디 하나 특출 나게 뛰어난 면이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 결코 부정적인 태도가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알고 난 뒤, 그토록 잊고 싶은 시간이었던 10대가 어쩌면 가장 찬란하게 빛날 수도 있었을 나의 10대일 수도 있었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왜 나의 10대 시절에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주는 멘토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된 뒤, 그제서야 비로소 헛되이 흘려버린 나의 10대가 너무나 안타깝고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녹스 오버스트릿이 성큼 책상 위로 올라갔다. 더욱 당황한 노란 교장의 눈에 또 찰리 랄튼이 올라서는 게 보였다. 교장은 어쩔 줄을 모르며 고함만을 칠 뿐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했다. 피츠에 이어 믹스가 책상 위로 올라갔고, 또 다른 학생들이 성큼성큼 앤더슨처럼 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한결 같이 버티고 선 채 키팅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 그들이 책상 위로 오를 때마다 키팅을 향해 소리친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부름이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의 대화였다. 새로운 이상과 삶의 존재를 확인하는 대화였다.  죽은 시인의 사회 296p, 톰 슐만, 모아북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두 번 다시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10대를 마친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올해, 나는 2번째 19살을 살고 있다. 두 번 다시는 부정적인 과거, 부정적인 사람들, 부정적인 기억들에 나를 묻어두지 않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다지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나의 40대가 얼마나 찬란할지, 또 얼마나 아름다울지 생각하면서, 후회와 실망, 또 근심 걱정 속에서 흘려버린 나의 10대를 곰곰이 추억해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의 10대 시절을 불러본다. 

 

나의 인생, 나의 10대야.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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