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준우 칼럼] 협상의 품격 시리즈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라'

스타트업엔 2021. 7. 1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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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는 나쁜 습관

 

이 세상을 거쳐간 모든 만물에게 24시간은 동일한 선물이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가치 없는 인생도 없지만, 시간을 관리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시간을 잘 관리하는 방법은 많지만,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면 자연스럽게 시간 관리는 잘하게 되어 있다. 시간 관리를 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 필요한 '이유'는 바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수년 전 무역회사를 창업했다. 이름만 무역회사였지, 1인 기업에 불과했다. 젊은 패기, 뚝심으로 시작하면 불가능은 없다는 믿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사상누각이었다.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시도한 사업은 지지부진했고, 별다른 성과 없이 실패했다. 사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상당한 경제적 타격과 어려움을 겪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들, 혹은 마음의 감각이 둔해서 타인의 고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좋은 게 좋은 거다.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온다.” 하는 식의 조언을 던져줄 만한 상황이었겠지만,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심각했다. 나 혼자만의 문제였으면 좋으련만, 그런 꿈은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가진 것 없는 남편에게 시집와서 사업도 실패하고, 고생만 실컷 하는 아내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싶었다. 그렇게 미적지근한 실패를 몇 차례 더 겪은 뒤, 다시 회사생활을 하기로 결정했다. 집에서 가까운 무역회사였고, 담당업무는 해외 영업이었다. 신입 사원보다 연봉이 50만 원 많은 경력직이었다.

 

매달 수십억 규모의 매출을 일으키는 회사였다. 연간 매출액 역시 수백억에 이르렀다. 회사 규모는 작지만 실속 있었다. 그러나 작은 실수에 민감했다. 특수 장비를 다루는 회사였고  하나의 오차라도 생기면 안 되는 일이었다. 늘 예민했다.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분위기에 휩쓸리기 마련이다. 회사에 속해있을 때는 회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물론 상명하복의 기업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윤이 창출되고, 안정적인 월급도 매달 보장받는다. 그만큼 냉정한 분위기를 가진 회사였다. 직원들은 서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가족 같은 따뜻함도 전혀 없었다. 삭막하고, 차가운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팀장은 내게 한 가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만든 바이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보고 매우 흡족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2달간의 시간을 줄 테니 바이어들을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보라.”라고 했다. 영어로 브리핑하는 자리였다. 내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자네 위에 있는 똥차(5년 차, 8년 차 대리)들은 믿을 수 없어. 천천히 준비해봐.”

 

대리와 과장들은 실력이 없었으며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팀장은 매우 꼼꼼한 성격을 갖고 있는 데다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직원의 입장에서는 냉정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품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보잘것없는 과정을 통해 결국 실패로 끝나버린 사업이었지만, 한 가지 배운 마음은 있었다. 어떤 위치에서 일하던지 사장의 마음으로 일하는 것,  그 마음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회사에서 사장의 마음으로 일하고 배운다면, 반드시 큰 결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내게 있었다. 팀장은 내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장의 마인드를 배운다거나, 그런 마인드를 갖고 일하는 사람은 팀장뿐이었다. 신입 사원이 바이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는 것은 일례가 없는 경우였다. 앞선 직원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충분히 마음이 상할 법한 상황이었다. 그 뒤로 직원들과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속담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직원들은 틈만 나면 모여서 담배를 태우며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은 실수에도 뒤에서 험담을 하곤 했다.

 

하루는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창고로 쓰이던 임원 사무실을 혼자 정리하다가 찾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더 골 (The goal)]이었다. 엘리 골드렛과 제프 콕스가 쓴 책으로, 미국 대부분의 기업들과 MBA스쿨에서 교재로 채택한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 양치질을 하는 짧은 시간에 책을 읽는 나를 보며 상무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장실에서도 책을 읽는 습관이 있네. 아주 좋은 습관이야. 창고도 깔끔한 게 마음에 들어. 참 좋은 직원이 들어왔네.” 그러나 함께 근무하던 대리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이런 것까지 이야기 안 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양치질하는 건 좋아. 근데 책까지 보는 건 이해가 안 되네. 다른 사람들은 바쁘게 일하는데, 좀 아니지 않나?”

 

생각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얼른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무실 분위기는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냉랭했다. 그들이 가진 생각의 깊이와 생각의 속도는 상무님처럼 깊지 않았다. 내가 ‘좋은 습관을 가진 직원’이 아닌 ‘개념 없는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일하는데, 저 사람은 화장실에서 책을 본다.” 그 부분을 문제 삼아서 꼬투리를 잡았고, 틈만 나면 모여서 험담을 했다.

 

어느 날이었다. 직원 하나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조그만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권고사직을 당했던 사람으로, 함께 입사한 경력직 대리였다. 그는 내 행동들에 대해 불편했던 점을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화장실에서 양치질하면서 책 보는 거, 개념이 없는 거야. 무슨 행동을 그런 식으로 하냐? 경력직으로 들어온 거잖아. 그리고 팀장이 하라고 한 프레젠테이션도 빨리빨리 해놔. 20분짜리 영문자료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렇게 어려웠다. 바이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어떻게 브리핑하느냐에 따라 적게는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계약이 체결될 수 있는 일이었는 데다, 모든 자료를 영어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매일 밤늦은 시간까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었지만, 그야말로 지지부진했다. 게다가 선임 대리들을 제쳐두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내가 맡은 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내가 뭐 도와줄 것 없냐? 쉬엄쉬엄해라.” 하고 이야기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이해관계의 문제였다. 그가 하는 말 전부가 이해되는 건 아니었지만, 나보다 나이도 많고 같이 입사한 사람이었기에 나쁜 감정도 없었다. 한참 이야기하기에 그냥 들어주었다. 그런데 대뜸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게 만만하게 보이냐? 뒷짐을 지고 다리를 떨면서 듣고 있네. 내가 니 친구야?”

 

손이 민망해서 뒷짐을 지고 있었고, 오랜 시간 앉아서 작업하다 보니 다리가 저려서 털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는 갑자기 욕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오해하신 겁니다. 혹 그렇게 보이셨다면 죄송합니다.”하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았다. 내 편에서 참을 이유는 없었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크게 싸웠다. 주먹다짐은 없었지만,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 육군 상사 출신 예비역이었던 그는 권위를 내세워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다리를 쭉 뻗고 턱을 괸 채 쳐다본 적도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마음의 깊이가 없었다. 철없는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직원들은 팀장을 어려워했다. 말수가 적고 냉정한, 그러나 마음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팀장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걸 무척 싫어했다. 고립된 마음으로 오랜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특유의 답답함, 권위 의식,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거만한 태도가 있다. 그 회사 직원들 대부분의 특징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항상 긴장해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밥을 먹을 때마다 숟가락이 떨렸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버틸까’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맴돌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라

 

얼마 후 사직서를 제출했다.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한 흔적이 그 날 일기에 적혀 있다. 만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결심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한 번씩 그때를 생각하면 씁쓸하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며 책을 보는 것. 그들의 눈에 그것은 분명히 ‘나쁜 습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나쁜 습관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게 사직서 제출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회사생활을 그대로 이어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퇴사한 다음 날, 직원들이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이야기해보자, 프로젝트는 마무리해야 되지 않느냐,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냐.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옳은 선택이라고 결론지었다. 나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곳에서 오래 근무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쉬운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다.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 물러섰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리를 박차고 나오긴 했지만,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때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고 믿는다. 집중할 것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내가 느꼈던 간절함이 더 중요했기에, 나는 미련 없이 퇴사를 선택했다. 퇴사만이 정답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퇴사하고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는 10분의 1로 줄어들었고, 수입은 더 늘어났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며 책을 보는 습관을 가진 나를 좋아해 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다. 그들의 삶은 내 롤모델이 되었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삶을 통해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 무역회사에서 근무했었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기회를 보는 눈 

 

까다로운 사람과 회사는 어디에나 있다. 그런 상황들에 일일이 반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인내가 필요할 때도 있다. 참아야 할 때도 있고, 정중하게 사과해야 할 순간도 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낄 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나의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대표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직원의 말을 허투루 들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다양한 경험과 도전으로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의 나는 작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실패의 경력이 풍부한 경력직 사원'에 불과했다.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직원들도 많았고,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영어 실력을 가진 직원들도 있었다. 다만 나는 실수를 다루는 기회를 많이 만나볼 수 있었기에 가장 합당한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나와의 협상에서 높은 만족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퇴사했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았다. 존중과 존경을 찾아볼 수 없는 회사에서 나온 뒤 훨씬 더 많은 기회와 자기 성찰의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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