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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헬렌 Q'의 성(性) 이야기 2편 '신라 왕실의 근친혼과 동성애, 그들은 신국神國이라 불렀다'

스타트업엔 2023. 5. 9.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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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신라시대의 성 풍속은 자유롭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문란하다고 비판을 하였는데 한 사회의 풍속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신라시대의 성 풍속은 『화랑세기花郞世記』를 통해 알 수 있다.

 

『화랑세기』는 고려 때 문신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김대문열전金大問列傳」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3년(704) 무렵에 편찬한 화랑에 관한 전기傳記로 전해진다. 원본은 확인되지 않았고 필사본이 전해진다.  런데 국보 제195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남녀 토우土偶에 대담하고 적나라한 성적 표현이 다양한 체위로 묘사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인의 성 풍습이 자유분방했던 것은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한편 신라의 화랑이 고대 신라에 있었던 청소년으로 이루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을 하는 조직으로 관리와 군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화랑세기花郞世記』는 화랑 중에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의 전기傳記로 화랑 사다함과 김유신, 김춘추 등도 풍월주를 맡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먼저 근친혼에 대한 내용은 국가가 편찬한 기록에 나타나 있다.

 

남녀가 눈 맞아 서로 통정하는 건 큰 허물이 아니었으며 자연 결혼 풍습도 동성同姓간은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 이종의 자매까지도 혼인을 했다. - 『삼국사기』, 「내물왕즉위조」

 

그런가 하면 22대 풍월주 양도는 모친 양명 공주의 강요에 의해 친누나 보량과 혼인하였는데 이 때 양명 공주는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화랑세기花郞世記』에 전한다. 즉 신라의 도道는 일부일처의 원칙 안에서 자유로운 성생활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 왕실은 근친혼으로 족보가 꼬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신라시대 토우들

23대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은 삼촌인 입종의 부인이 되어 24대 진흥왕을 낳았다. 진흥왕에게 법흥왕은 큰 아버지이며 모계 쪽으로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은 유부남으로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하여 처남과 매부 관계였고 훗날에는 태종무열왕의 딸이 김유신의 후처가 되었으니 장인과 사위로 중첩된 인척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보다 9살 많았고 환갑 때 10대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신라 왕실의 근친혼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그 배경은 족외혼을 금지했기 때문이었는데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속을 강화시켜 왕실 권력을 보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게 통설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왕실의 막장 족보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다.

 

한편 『화랑세기』에는 남성 간 동성애를 직접 지칭하는 용양龍陽이란 표현이 보이는데 용양龍陽은 중국 『전국책戰國策』 에 나오는 고사故事로 전국시대 위왕魏王이 용양군龍陽君을 남색 대상으로 삼았던 데에서 유래한다.

 

풍월주 호림공의 부제였던 보종은 미실의 아들인데 풍월주가 되어 염장을 부제로 삼았고, 자신보다 여섯 살이 어린 염장과 부부와 같은 정을 나눴다고 한다. 염장은 후에 보종의 재산을 자신의 재산처럼 쓰며 살았다 한다. 보종은 호림공과도 동성애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남색男色의 삼각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에만 있었던 제도가 마복자였다. 마복자摩腹子는 ʻ배를 문지른 아이ʼ 정도의 뜻으로 해석되는데 지위가 낮은 남자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상관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을 말한다. 소지왕에 뒤이은 22대 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도 남편의 씨를 임신한 몸으로 소지왕을 섬겨 태어난 아들이라고 하였다. 

 

마복자 제도는 사회. 정치적인 추종자와 마복자가 서로 공생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관료사회에서 혈연, 지연, 학연에 따라 서로 챙기는 것과 비슷한데 성생활이 개입된 부분이 다를 뿐이다.

신라시대 토우들

◇ 3명의 남편을 거느린 선덕여왕

 

한편 신라시대 40여 년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은 드라마로도 유명한 미실美室이다. 미실은 사다함과 사랑을 하다 그가 죽은 후 사다함의 의붓동생인 제7대 풍월주 설원랑을 총애하여 제16대 풍월주 보종을 낳았다. 그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아들 동륜태자, 설원랑 등의 사이에서 자식을 계속 낳았다. 미실의 가문은 색공지신色供之臣으로 권력을 계속 유지할 목적이었고 미실이 왕실과 귀족의 남성들과 관계를 하며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색을 밝혔기 때문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그런가 하면 선덕여왕은 즉위한 뒤 삼촌인 용춘을 남편으로 삼았으나 역시 아이를 갖지 못하자 용춘이 물러나고 왕명에 따라 언니 천명공주의 남편이자 형부인 용수가 선덕을 모셨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여 논의해 결정하기를 삼서지제(三壻之制: 남편을 3명 둘 수 있는 제도)에 따라 흠반과 을제에게 선덕을 함께 보좌하게 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남편을 3명이나 두었지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자 사촌동생인 진덕이 여왕이 되었다. 마지막 남은 성골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왕실의 근친혼과 동성애, 마복자 제도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데 이는 폴리아모리Polyamory(‘많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합성어)를 연상시킨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혈연과 색연色緣으로 결속된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글/사진=임해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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