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활자화
얼마 전 지인분의 초대로 글쓰기 온라인 특강을 했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분들과 좋은 시간을 가졌다. 기회는 이처럼 문득문득 찾아오는 습관이 있다.
글은 마음의 활자화다. 펜을 들고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적으면 글이 된다. 글쓰기 특강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으나, 1시간동안 이야기한 내용들도 모두 마음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의 기술이나 방법을 다루는 것이 실제로 글을 쓰는 데 얼마나 큰 영향으로 작용하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계신다. 포근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지적인 내공이 상당히 깊은 분이었다. 칼럼니스트, 강사, 국제대안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경험이 있는 이 분을 볼 때마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이 분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국제대안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때 쓴 글이었다. 그 중 마음에 남는 문장이 있었다.
학생들이 무서워서 교장실에 숨어 있었다. 교장이라고 하기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마음을 감추고 글을 쓰는 사람들
지난 10월, 극단적 선택을 한 여대생의 이야기가 언론을 뜨겁게 달구었다. 글을 쓴 여대생은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삶을 비관하는 글을 썼다가 '조용히 죽어라'는 악플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악플을 단 이용자들을 처벌해달라.'는 내용을 남겼다.
죽음에 대해, 고독에 대해,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 부모님,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주변에 있었더라면 그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혼자 나가서 정처없이 여행을 다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상당부분이 치유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의 고립은 익명 게시판에 삶을 비관하는 글을 쓰는 것과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처럼 마음의 결을 몰아간다. 극단적 선택을 결정케 하는 마음의 고립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이 여대생은 삶을 비관하는 '글'을 남겼다. 주변 사람들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마음의 이야기를 온라인 커뮤니티에 남겼으리라. 성적, 경제적 형편, 이성관계,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 여대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댓'글'을 남겼다. 글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어봐야 할 안타까운 사건이다.
칼럼니스트나 신문기자처럼 고정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 혹은 책을 쓰는 작가의 글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글이 아니다. 푸근하거나 포근한 글이 있는 반면, 딱딱하고 차가운 글도 있다. 개중에는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듯 날카로운 글도 있다. 마음의 완충장치가 없는 사람이 쓰는 글은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글쓰기의 기술이라는 것도 쓰다 보면 자연스레 훈련이 될 뿐, 완충장치가 없는 글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글과 삶이 다르다면 글을 쓰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글을 쓰는 사람은 대개 두 종류다. 고립된 사람이거나 글을 통해 소통하는 사람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낸 사람들, 고립된 사람들의 글에선 슬픔 외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악플은 글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악플을 고귀한 글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고립된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남긴 배설물에 불과하다. 상대방의 감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악플을 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통하지 않고 생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다.
◇악플은 글이 아니다
나는 잘 쓴 글은 꼼꼼히,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가면서 읽는 편이다. 서재에는 4, 5번 반복해서 읽은 책들도 꽤 있다. 태어나서 처음 구매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대부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두었다. 수십번 반복해서 읽은 흔적이 남아 있는 훌륭한 재산이다.
반면에 나는 악플을 읽지 않는다. 내가 쓴 글에 누가 악플을 달아두면 읽지 않고 즉시 삭제하거나 신고처리한다. 악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반박하는 댓글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논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적은 댓글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 에너지를 쏟고 싶지도, 얽매이고 싶지도 않다. 악플, 혹은 빈약한 논리로 반박하는 댓글을 삭제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상대가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논리적으로 반박 후 일방적으로 끝내버린다.
악플은 생각을 정리하지 않는 사람들이 즐겨쓰는 감정 해소의 도구다. 상대방의 글에 구구절절 장문의 악플이나 감정섞인 댓글, 논리적으로 전혀 정돈되지 않은 반박문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이 고립된 사람들이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치료받지 못한다면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글은 마음을 털어놓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자신이 고립되는지도 모른 채 산다. 지나치면 많은 것을 잃는다.
단순한 글은 단순한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생각이 복잡하면 글도 복잡해진다. 생각을 정리하는 훈련으로서의 글쓰기는 정리된 삶을 사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훌륭한 기회다.
◇글의 의미를 곱씹으며
새벽 이른 시간에 글을 쓰노라면, 두껍고 무거운 국어사전을 한 자 한 자 뜯어볼 때가 있다. 그렇게 아름다운 단어들이 만들어졌을까, 신기할 때가 있다.
'구수하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맛 혹은 냄새가 비위에 좋다, 마음씨나 인심 다위가 넉넉하고 푸근하다.'이다. '넉넉하고 푸근하다'는 말은 또 어떤가. 단어 속에서 사람을 미소짓게 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반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단어나 속담을 발견하기도 한다. [개살구 지레 터진다]는 속담은 '별볼일 없는 사람이 짐짓 잘난 체 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도사리]라는 단어는 바람이 불었을 때, 혹은 병이 들어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 풋과일을 일컫는 단어다.
반면에 저절로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단어도 있다. [쓰라리다]는 단어는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든다. 어감이 강하기 때문인지 부드럽지 않고 개운치 않는 느낌마저 든다. [쓰레기]도 마찬가지고 [복잡하다]는 동사 역시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운을 풍긴다. 감정, 맛, 촉각, 시각을 나타내는 표현을 적절한 단어와 속담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는 훈민정음이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현상에 걸맞는 단어가 사람들의 마음에 대체적으로 들어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살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질문하는 걸 들었다.
"엄마, 징그럽다가 무슨 뜻이야?"
"엄마 몰라."
내가 다가가서 이야기했다.
"너 뱀 알아?"
"네 알아요."
"그거 만질 수 있어?"
"아니요."
"왜? 뱀 무서워?"
"아니요."
"그럼?"
"......"
"그럴 때 '징그러워서 못만진다'라고 하는거야."
남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뜻은 살면서 차차 배워가겠지만, 징그럽다는 표현이 대체로 털이 없는, 그러나 살아서 펄떡이는 생명체를 손으로 만질 때 느껴지는 차갑고 미끄러운 불쾌한 촉감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이다.
글에는 온도가 있고, 맛이 있다. 따뜻한 글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차가운 글에는 차가운 온도가 느껴진다. 글은 마음의 활자화다. 그리고 말의 활자화이기도 하다. 마음은 말로 표현하고, 말은 글로 옮겨진다. 마음은 곧 글이며 말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말, 따뜻한 마음을 가진 글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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