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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강윤 소방관의 이야기 ⑪ '6월의 기억'

스타트업엔 2020. 9. 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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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엔 특별기획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시리즈 열 번째, 김강윤 소방관의 동료에 관한 이야기

 

스타트업엔에서는 특별 기획으로,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연재하고자 한다. 그 열 번째 이야기는 불철주야 국민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 부산 기장 소방서 구조대 소속 김강윤 소방관의 순직한 동료의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인 '6월의 기억'이다.

 

 

아이스 다이빙 후 범석이와 (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6월의 기억
"형님... 범석이가..."

범석이의 죽음을 전하는 후배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그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마른 침만 연신 삼키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석이의 부고를 알리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메시지를 읽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마구 솟구쳤다가 이내 정신 차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팀장님께 범석이의 부고를 알리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여름철 수상구조대 운영을 위해 해운대 해수욕장에 파견근무 중이었던 그때, 2014년 6월의 그때를 지금도 기억한다.

◇최강 소방관
범석이와의 인연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방서에 들어온 지 2년 차인 내가 전국 소방기술경연 대회 최강소방관 분야의 선수로 출전하며 범석이를 처음 만났다. 1년에 한 번씩 소방관으로서의 체력과 기술을 겨루는 대회에 부산소방의 대표로 범석이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범석이는 소방서 근무 경력으로 보자면 나보다 선배다. 2년 먼저 임용되었고 현장 경험도 풍부하며 체력과 기술을 겸비한 그야말로 부산소방 구조 대원 중에서 '에이스'였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범석이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 본 범석이는 듣던 대로였다. 작은 키였지만 탄탄하고 균형 잡힌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훈련하던 첫날 산악 달리기를 하는데 나와의 거리가 100m가 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빨랐고 체력도 상당했다.

 

중앙구조본부 수난구조팀에서 범석이(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범석이는 나를 형으로 대해줬다. 소방으로 봐서는 내가 2년 후배였지만 5살이나 많은 나를 먼저 '형님'으로 대하면서 친근하게 다가와 줬다. 고마웠다. 고되고 지루한 연습을 마치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우리는 더욱 돈독해졌다. 범석이는 순수하고 착했다.

술자리에서 남자들 사이에 있을법한 흔한 욕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구조 대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두 달여 동안 함께 몸을 부대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리고 서로의 미래를 향해 함께 노력했다.

전국 대회에 출전하여 입상권으로 분류되었던 범석이는 아쉽게 4위를 했다.(이 대회에서 우승하여 특별승진을 한 구조 대원이 현 로드FC 소방관 파이터 신동국 구조 대원이다.)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함께 출전한 전국의 구조 대원들도 범석이에게 찬사를 보냈다.

성실한 훈련 자세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어디서나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나와 범석이는 형제처럼 가까워졌다. 대회가 끝난 그 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수난구조에 대한 나의 평소 생각과 꿈을 이야기하자 범석이는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고 언제든 함께하겠다고 다짐해주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존경심마저 들 만큼 모든 것이 꽉 찬 진정한 남자였다.

 

레스큐 스위머 교육 중. 오른쪽 5번째가 범석이(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포크맨 김범석
그 후 내가 소방학교로 발령받아 근무하는 중에 '레스큐 스위머 강사 과정'을 기획하게 되었다. 미국의 우수한 수난구조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바다에서 일어나는 수난 사고에 대한 선진기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범석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무조건 범석이가 함께 할 교육이었다.

범석이는 기쁘게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3주 동안의 교육기간 중 범석이는 놀라운 체력과 정신력을 발휘하였다. 무엇보다 밤늦게까지 파도치는 바다에서 훈련을 하고 12시가 다 되어 숙소로 돌아오면 다음날 강의 발표과제를 준비하는 게 여간 곤욕이 아니었는데 범석이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강의자료를 찾아서 새벽까지 과제를 준비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막걸리를 네댓병 비우고도 아침에는 가장 일찍 일어났다.

 

미국 콜로라도 급류구조 교육에 참석한 범석이(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꼼꼼하고 남을 배려하는 범석이의 성격은 교육기간 동안 빛을 발하였다. 한 번은 주 교수로 참여한 '마크 리' 교수님이 식사를 함께 하는데 범석이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플라스틱 포크를 전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통역을 통해 물어보니 교수님은 수년 전 훈련 도중 손을 다쳐 젓가락으로 식사하기가 불편한 것이었다. 모두들 힘든 훈련 때문에 허기가 저 허겁지겁 밥 먹기 바쁜 그때 범석이는 교수님의 불편한 젓가락질을 보고 얼른 포크를 구해다 드린 것이다. 교수님은 범석이에게 감동받았다고 했다. 그 이후 교육기간 내내 교수님은 범석이를 '포크맨'이라고 불렀다.

그 교육이 끝난 뒤 얼마 되지 않아 범석이는 중앙 119구조본부(이하 중구본)로 떠났다.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중구본은 그 당시 명실 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구조 전문 기관이었다. 구조 대원이라면 한 번쯤 근무해보고 싶은 곳이었고 당연히 부산의 '에이스'범석이는 자의반 타의 반으로 중앙 무대로 당당히 떠난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범석이와 연락을 하며 지냈다. 중앙에서의 생활이 녹록지 않음을 범석이는 고백했고 나는 그런 범석이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내가 아는 범석이는 전국 최고의 구조 대원이 되기에 충분했다. 중앙에서도 당연히 '에이스'가 되어야 했다. 범석이는 늘 그랬듯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멀리 부산에서도 범석이의 소식은 들렸다. 중구본의 구조 대원들은 부산에서 웬 '미친'녀석이 올라왔다고 했다. 우스개소리였겠지만 범석이라면 충분히 그런 소릴 들을만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범석이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정말 '미친 듯' 노력하는 놈이기 때문이다.

◇테크니컬 다이빙의 시작, 그리고 형제들
내가 소방학교를 떠나 범석이가 근무했던 부산소방 특수구조단으로 갓 오게 되었을 때 범석이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행님~! 테크니컬 다이빙 함 배보실래예~?"
"테크...머?? 그기 먼데?"
"마.. 그런 거 있어 예. 저 믿고 함 하입시다~"
"니가 하자 하면 하지 머~"

범석이의 이 전화가 소방관으로서의 내 운명을 바꾸었다. 그 후 나는 나의 멘토인 중구본의 한정민 선배님에게 테크니컬 다이빙을 배우게 되었고 새로운 다이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부산에서 경기도 남양주와 강원도 바닷가로 수십 번을 오가며 배우는 고된 과정을 범석이는 늘 나와 함께 했다.

 

테크니컬 다이빙 중인 범석이(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비싼 테크니컬 다이빙 장비를 당장 구할 수 없어 범석이의 장비로 연습을 했다. 그때마다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면서 격려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이 어린 동생이 아니라 소방의 선배였고 존경하는 구조 대원이었다.

이때쯤 한정민 선배님과 방경호, 김경호, 유일수 등 중구본 최고의 구조 대원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다이빙했다. 지방에서 어렵게 배워가며 실력이 한참 부족한 내가 범석이 덕분에 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더욱 열정적으로 다가갔다. 모두 함께 서로의 앞날을 즐겁게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형제처럼 가까워졌고 함께 수난구조 분야의 중요한 역할을 해보자며 장밋빛 미래를 그렸다. 힘들지만 즐거웠다. 범석이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내게 말했다.

"행님~~!! 같이 하길 잘했지예??"

희귀병
2013년 가을 어느 날. 부산의 한 수영장에서 운동을 하고 나오자 전화기가 울린다.

"강윤아... 범석이가 많이 아프단다.."

금정 소방서 구조대의 친한 팀장님은 떨리는 목소리로 범석이가 암에 걸렸다며 나에게 말했다. 얼마 전 범석이와의 전화 통화에서 범석이는 가슴이 답답한 듯 통증이 있어 병원에 간다고 했었다. 범석이의 체력을 모를 리 없는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 가볍게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직접 전화해서 물어봤다. 범석이는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혈관 육종암'. 생전 처음 듣는 병 이름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버버되었다. 오히려 범석이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걱정마라며 나를 위로했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억지로 참으며 겨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정신 차려보니 수영장 앞 주차장에서 나는 혼자 울고 있었다.

괜찮을 거라 믿었다. 병을 얻었다는 슬픔은 잠시였고 범석이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부산은 범석이의 고향이자 소방 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이곳에서의 옛 동료들 모두 범석이가 건강해질 것이라 믿었다. 이듬해 봄 세월호 사고가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할 때 범석이의 하나뿐인 아들의 돌잔치가 부산에서 치러졌다. 부산의 옛 동료들로 가득 찬 돌잔치 식당에서 범석이는 당당하고 우렁차게 말했다. 반드시 병을 이겨내겠다고. 다시 중구본으로 건강하게 복귀하겠다고. 비록 항암치료로 깡마른 모습이었지만 특유의 미소와 당당함은 그대로였다.

그 자리에서 내 손을 굳게 잡으며 범석이는 말했다.

"세월호 현장에 내가 갔어야 하는데 아쉽네예 형님..."

범석이의 마음은 중구본 동료들이 고생하고 있는 세월호 구조현장에 가 있었다. 범석이 다웠다. 네 몸이나 잘 챙기라며 나는 타박하듯 말했다. 진도 앞바다에는 우리 다이빙 팀 '형제'들이 밤낮없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도 쪽 일보다 범석이의 몸이 우선이었다.

돌잔치의 분위기는 즐거웠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 범석이의 쾌유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범석이는 당장이라도 술잔을 기울일 기세였다. 오랜만에 다 같이 웃고 즐겼다. 암? 그까짓 거 범석이 녀석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거라 생각했다.

 

범석이가 준 더블탱크(사진=김강윤 소방관 제공) 

 

◇더블탱크
해수욕장 개장을 준비하던 어느 날 범석이가 전화를 해왔다. 목소리가 조금 힘들게 들렸다.

"행님... 남양주 올라와서 내 거 더블탱크 가지고 가이소..."
"더블탱크? 그건 왜?"
"깨끗이 정비해놨으니 행님 당분간 쓰이소... 행님 탱크 없잖아 예..."
"마 됐다. 니꺼를 만다꼬 내가 쓰노..."
"행님 주는 거 아입니다. 빌려주는 거라예. 다 나으면 다시 반납 받을 거니까 얼른 와서 가지고 가이소!"

힘든 목소리였지만 완강했다. 범석이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녀석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가지러 가는 날 나와 본다고 하니 얼굴이나 볼 겸 다음 날 급하게 올라갔다.

범석이는 나오지 않았다. 중구본 직원에게 전해놓은 탱크를 나는 무심히 차에 실어 가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전화를 하니 전화기가 꺼져 있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동안 두어 번 더 걸어봤지만 신호음은 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범석이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나는 오열했다. 장례식장 밖 계단 아래 한 귀퉁이에서 후배의 가슴팍에 안겨 미친 듯이 울었다. 목이 찢어지는 듯했다. 믿기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겨우 진정하고 앉아 있으면 주위에 누군가 또 울었다. 그렇게 같이 또 한참을 울었다. 범석이가 왜 이렇게 되어야 했는지 누가 이유를 말해줬으면 했다. 밤새 장례식장을 지키는 동안 내 속에 커다란 무언가가 덜컥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떠나는 마지막 날, 화장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범석이의 관을 또 울면서 바라보았다.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 흐르는 눈물이 흐르자마자 얼굴에 말라붙었다. 그렇게 2014년 6월, 범석이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범석이의 술잔
범석이의 병은 희귀병이었다. 범석이가 떠나고 난 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업무 연관성이 있다 하여 '순직'으로 인정받았다. 비록 떠나고 없지만 범석이의 명예가 조금은 지켜진 듯하여 다행이다. 순직에 대한 문제로 범석이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떠난 이의 유산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죄인 듯했고, 생전에 고인과 친했다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있는 위치나 나의 경력 그리고 생각까지도 범석이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나는 범석이를 좋아했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지만 그를 존경했다. 가끔 소방서 생활이 힘들 때면 술 취해 전화해 현실을 한탄하며 범석이에게 위로받았다.

그런 범석이가 떠난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잊지 않는 것'뿐이었다. 레스큐 스위머를 함께 했던 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면 늘 범석이의 술잔을 한잔 더 따라 놓고 첫 잔은 범석이를 위해서 건배하는 것이 유일한 우리만의 추모 방법이었다.

그렇게 마신 술에 취해 그리워 또 눈물을 흘렸고 어디선가 녀석이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잊지 않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범석이가 나에게 준 탱크로 지난주에도 다이빙을 하고 왔다. 거기에는 범석이와 함께 한다는 문구를 프린트하여 붙여놓았다. 범석이가 정성 들여 칠해 놓은 하얀색 페인트는 내가 사용하는 동안 여기저기 긁히고 벗겨졌다.

아마 이 장비를 나는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 같다. 내게 남겨진 유일한 범석이의 유산이다. 그 장비를 사용할 때마다 그가 더욱 생각난다. 사람들이 장비에 대해 물어보면 일부러라도 범석이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아는 최고의 구조 대원이 쓰던 장비였다고.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사나이었다고.

 

글/사진 김강윤 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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