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뙤약볕 속 짙은 초록빛 가로수 군락에 흰꽃이 별처럼 점점이 박혔다. 한여름에 피는 저렇게 예쁜 꽃이 있었나 싶어 다가가보니 무궁화다.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선 이태백의 시를 보자.
뜨락 꽃들이 아무리 고와도
연못가의 풀들이 아무리 예뻐도
무궁화의 아름다움은 따르지 못하네
섬돌 옆 곱고 고운 무궁화 꽃이야.
시경(詩經)에는 ‘안여순화(顔如舜華)’라 하여 무궁화꽃을 예쁜 여인의 얼굴에 비유하고 있다.
이집트의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히비스다. 무궁화의 학명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ibiscus Syriacus)는 원산지가 시리아인 히비스 여신을 닮은 예쁜 꽃이라는 뜻이다. 아욱과에 속하는 꽃들은 다 예쁘다. 무궁화,부용,접시꽃,닥풀이 모두 그렇다.
당아욱(사진=방재희 기자)
예로부터 무궁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 이어졌지만 정작 무궁화를 국화로 삼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하다.
나조차도 국공립기관 뜰에나 의례 심는 무궁화가 왠지 정치적인 꽃으로 여겨져서 무궁화꽃 자체에는 집중해본 적이 없다.
개나리처럼 산에 들에 자생하는 씩씩하고 장한 꽃도 많은데, 왜 하필 진딧물도 많고 볼품없이 조화처럼 피는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정했을까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일제시대 무궁화 말살정책의 영향 이었다는 것을 알고나서 무궁화에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조선시대는 붕당정치로 싸움박질하느라 발전을 못했다는 둥, 우리 민족은 모래알처럼 혼자는 강해도 뭉치지는 못한다는 둥, 무궁화에 진딧물이 많이 꼬이는 것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숱하게 받아온 우리나라 처지와 같다며 비하한 내용까지, 35년의 일제치하가 가져온 편견은 끝이 없다.
독립운동의 상징이던 무궁화는 일제가 어린학생들을 대상으로 몹쓸 꽃이라는 가르침을 한 덕에 천대받는 꽃으로 전락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어린시절 보고 자란 것은 평생 영향을 미친다. 한번 짓밟힌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는 힘든 법.
그럼 무궁화는 어떻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 됐을까?
가까이는 애국가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면서부터다. 애국가의 작사가 안치호와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 행적 때문에 무궁화도 싸잡아 오해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를 무궁화와 연관짓는 기록은 꽤나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시대 인문지리서 [산해경]에는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薰華草)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는 구절이 있다. 이 기록으로 우리땅에는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무궁화가 지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하여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활의 나라,발해)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라며 신라를 무궁화의 나라라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고려도경]에는 "근역삼천리"라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애국가에 삽입된 '무궁화 삼천리'의 한자식 표현이다.
무궁화가 고려시대 이후에는 장원급제할 때 선비가 쓰는 어사화로 사용되어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궁중에서 잔치가 있을 때 신하들이 사모에 꽂는 진찬화로도 사용됐다.
어사화로 쓰였던 무궁화 이미지를 되살린 모습(사진=네이버 블로그)
국권이 상실되던 해 9월, 애국지사 황현(1855-1910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무궁화와 나라의 운명을 같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슬픔에 젖었네.
무궁화 이 강산이 이젠 침몰되어 버렸네.
일제시대에 무궁화 보급운동을 벌인 남궁억은 “예로부터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았으며 어떤 꽃보다도 은근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점잖고 겸허한 선비의 풍모를 갖추어 우리의 민족성과 비슷하므로 이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로 삼기에 충분하다”라고 설명한 인쇄물을 만들어 몰래 배포했다. 그는 홍천에 보리울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면서 한켠에 무궁화밭을 가꿨다. 무궁화를 나무 생김새가 비슷한 뽕나무와 섞어 우편배달부 자전거로 실어날랐다.그의 꿈은 온 나라를 무궁화 삼천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남궁억은 이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이후 일제는 무궁화와 태극기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말살정책을 펼쳤다.
효창공원에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 5인의 넋을 위로하려 안중근,김구,윤봉길,이봉창,백정기 무궁화를 각각 심어 무궁화가 독립운동의 표상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무궁화 씨를 보면 휘돌아가는 태극문양에 날개를 달고 어디든 퍼져나가는 모양새다. 일제가 이것만 봐도 아연실색하지 않았을런지.
일제강점기 시절,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궁화는 볼품없고 진딧물만 꼬이는 '진딧물 꽃'이다", "무궁화는 '눈에 피는 꽃'이라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서고 눈병이 난다"거나, “손에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나는 부스럼꽃",“무궁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먼 다”며 무궁화를 캐내고 사꾸라(벚꽃)를 심게 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가 있다. 술래가 뒤돌아 서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동안 재빨리 움직여서 술래에게 다가가는 놀이이다. 왜 놀이용 10음절에 진달래꽃이나 개나리꽃 대신 무궁화꽃이 등장했을까?
백제의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꼬시기 위해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선화공주님은 밤마다 서동도련님을 안고 간다"라는 아슬한 19금 동요, 서동요를 가르쳤다. 아이들이 동네방네 돌아아니며 부른 노래는 삽시간에 퍼졌고, 신라왕궁에까지 들어갔다. 선화공주가 변명할 여지도 없이 쫓겨나자 무왕은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는데 성공한다. 무왕이 아이들의 노래를 꿈을 이루는 무기로 이용한 것이다.
일본의 '오뚝이가 넘어졌다','스님이 방귀를 뀌었다'라는 10음절을 이용한 놀이가 우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와 비슷하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건너온 놀이에 누군가가 무궁화 대목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남궁억을 가두고, 그가 키우던 무궁화 묘목 7만주를 불태우고, 학교에서 무궁화를 미워하도록 교육하는 등 말살정책을 폈지만 아이들의 놀이에 쓰이는 노래까지 막지는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놀이로 일제에 항거한 놀라운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심리학에 '금지된 과일 효과'라는 것이 있다. 일방적 금지와 폐지가 오히려 호기심을 발동시켜 역효과를 유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심리학을 꿰뚫어 강력한 놀이의 힘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발현한 누군가가 대단하다.
오늘 핀 무궁화는 어제 본 그 꽃이 아니다.
겹꽃은 예외가 있어도 홑꽃은 예외없이 아침에 피어 오후에 오무라들고 저녁에 떨어지는 하루 꽃이다. 여기서 나온 별명이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매일 아침 새꽃이 핀다는 의미)다. 무궁화 한그루에서 평균 2~50송이 꽃이 피니, 꽃이 피고 지는 7~10월의 긴 개화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꽃이 새로 달리는지 일일이 세기도 힘들다.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은 그의 시구에서 “무궁화는 하루 동안 스스로의 영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나는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골짜기의 백합화"라는 성경구절에 등장하는 샤론의 장미가 바로 무궁화다.
샤론의 장미, 무궁화를 유럽에서는 구세주의 꽃이라 부른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졌다가 다음날 새로운 꽃이 피는 무궁화이기에 메시아로 올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게 된건 아닌가 싶다.
무궁화는 여름내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효능도 뛰어나다.
요새 유행하는 히비스커스차는 바로 무궁화차다. 무궁화의 학명이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ibiscus Syriacus)로 불리기 전에는 그리스어로 Althea rosea라고 불렀는데, 이는 '치료하는 장미'라는 뜻으로 무궁화의 약용효과가 뛰어남을 나타낸다.
무궁화의 효능은 <향약집성방>과 <본초강목>에도 언급되며, 특히 <동의보감>에서는 무궁화를 차로 마시면 풍을 다스리고, 꽃가루를 물에 타 마시면 설사를 멈추게 한다고 수시로 마시라 권유하고 있다. 다이어트에 노화방지까지 해준다는 히비스커스차, 우리 조상님들이 권한 무궁화차를 마시며 남은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주리라.
스타트업엔 방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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