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준우 칼럼] 'Resque, 그 아름다운 이름에 대하여'

스타트업엔 2021. 9. 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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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이 되다

 

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사실 내 편에서 친해지려고 부던히 노력한 경우였다. 훤칠한 키에 미남형 외모, 굳게 다문 일자형 입술을 가진 그 선배는 또래 남학생이 봐도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어떤 초등학교 여학생이 연락처를 묻더란다. 가르쳐주었더니 그 때부터 결혼하자고 졸라서 애를 먹었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어머니랑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여학생이 "나 말고 만나는 여자가 있느냐"며 떼를 쓰는데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미남은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그 선배는 학교를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였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때 선배는 숨만 조금 고를 뿐,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1등으로 들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더니, 얼마 뒤 UDT에 입대했다는 이야기를, 선배의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20대 초반, UDT를 동경하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제대하면 그때뿐인 군대에 뭣하러 충성을 다 하느냐'는 어른들의 충고도 한 귀로 사뿐히 흘려버릴 만큼 매력적인 곳이 특수부대 아닌가. 좀 더 강한, 좀 더 힘든, 좀 더 남자다워질 수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 하다고 느꼈다. 그 나이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특수부대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를 통해 들은 UDT는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뿐더러, 상당한 인고의 세월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UDT에 입대한 그 선배는, 생일이 빠른 내가 친구들보다 한 해 늦게 입대한 뒤 2년 뒤에 제대하고 난 뒤에도 제대를 한참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대학 복학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는 제대를 6개월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내가 제대한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부러워하는 듯한 말투에서, 결코 편안한 세월을 보낸 게 아니었겠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선배는 여전히 미남이었고 친절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눈빛이었다. 뽀얀 얼굴에 웃을 때 아름다운 곡선이 지는 선배의 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할 만큼 예쁜 눈이었다. 그 눈빛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잘 지내고, 또 보자."하고 악수를 하는 순간 마주친 선배의 눈빛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강렬했다. 단단한 팔뚝, 건장한 체구, 숱한 해상훈련으로 만들어졌으리라 짐작되는 검붉은 피부. 5년이라는 시간은, 순수한 20대 청년을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매력적인 남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몇년 뒤 선배는 소방관이 되었고, 같은 업종의 여성분과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다는 전제 하에 모든 직업은 존귀하다. 귀한 직업이 어디 있으며, 천한 직업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방관, 119 구조대원은 선배의 스토리 정도에 국한되어 있었다. 선배는 미남이었고, 체력이 좋았으며, 친절했다. UDT를 제대한 뒤 소방관이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의 인식범위도 딱 거기까지였다. 특수부대를 나왔거나 그에 상응하는 강한 육체와 정신력을 가진 분들,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도와주시는 분들, 그 외에는 불 끄는 일을 하시는 분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면서 신체가 심각하게 훼손될 만한 사건 사고를 얼마나 만나겠는가? 38년을 살면서 실제 119구조대원과 1:1로 대면한 것도 [Resque]의 저자 부산소방재난본부 김강윤 팀장님을 뵌 것이 처음이었다.

 

세상에 똑똑한 사람은 많다. 돈이 많은 사람도 많다. 수년 전 만난 어느 분은 내 책을 들고 와서 싸인을 해달라고 하시며 자켓 안에서 몽블랑 펜을 꺼내들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이야기한 그 분은, 나와 1시간 가량 이런저런 담소를 마친 뒤에는 꾸벅 인사를 하시곤 포르쉐 911을 타고 갔다. 내가 확신하건대, 포르쉐 911은 그 분이 갖고 있는 외제차들 가운데 가장 저렴한 차였다. 그 외에 박사 출신의 교수님, 혹은 상당한 사회적 명성을 가진 분들과 대면을 할 수 있는 계기도 종종 있었다. 나름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 덕분에 스스럼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경청할 만한 스토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분은 1시간 동안 자기 이야기만 했고, 어떤 분은 말의 50%가 조언과 교훈이었다. 

 

20대 때는 모든 것이 서툴다. 사람을 대하는 것, 이성관계를 형성하는 것, 사회생활을 하는 것,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엉성하다. 돈 많은 사람이 좋아보이고, 잘 나가는 친구들이 부럽게 느껴진다. 그러다 나이가 들어 30대, 40대가 되면 모든 것들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긴다.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을 곁에 두게 된다. 나이를 떠나 동료가 되며, 우애가 생긴다. 때로는 강한 영감, 삶에 대한 의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지혜나 용기, 담대함을 주는 사람과 조우하는 기회도 생긴다. 

◇죽음을 생각하며

 

저자는 종종 메세지와 전화로 안부를 묻는 분이었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직업을 가진 분이라는 생각, 글이 참 담백하다는 생각은 했다. 그게 다였다. 세상에는 수십억명의 사람이 있고, 그만큼 다양한 직업이 있으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Resque]를 읽는 동안, 만약 기회가 되어서 대면을 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큰 절을 한 번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구조대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존경심, 게다가 책을 집필한 작가로서의 권위도 물론 있었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는 직업, 그것을 글이라는 도구로 풀어냈다는 것이 내 마음을 무척 뜨겁게 흔들었다.

 

이 일을 하다 보니 부부가 함께 평생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반려자와 아침을 함께 맞이하며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다. 적어도 함께하는 시간이 다 되어 감을 알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생을 마치는 것이 큰 축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Resque 150P』, 김강윤, 리더북스

 

작년 요맘때쯤이었다. 잠에서 깬 아들이 배고프다고 앙앙거리던 때가 있었다. 가정적인 남편 운운하며 분유를 타서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이유없이 눈물이 터졌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아들을 안고 울었던 것 같다.

 

갑자기 터진 눈물은 아니었다. 나도 아버지, 엄마한테 이런 아들이었을텐데 왜 그렇게 속만 썩였을까, 왜 철없이 대들고 함부로 살았을까, 하는 늦은 후회가 마음을 두드렸다. 25살 이후, 내가 아닌 남들을 위한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 뒤부터 내 인생은 늘 가치있는 일이 우선이었다. 봉사를 하는 것, 글을 쓰는 것, 누군가를 돕는 것, 어린 아이들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나에겐 그런 것들이 우선이었다. 가족은 두번째였고, 회사와 일은 늘 세번째였다. 후회 없는 12년을 보냈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결코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아들이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명절 때마다 빈 손으로 가는 아들, 용돈 한 번 제대로 못 드리고 늘 그냥그냥 사는 아들, 나는 그런 아들이었다. 

 

소방관의 아내로 사는 삶은 쉽지 않다. 반려자의 출근 인사가 살면서 나누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 『Resque 203』p, 김강윤, 리더북스

 

아들을 출산하면서, 그런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어느 연예인이 "아들의 대변에 밥을 비벼먹으라 해도 먹을 수 있다."는 표현을 한 적 있었다.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들을 눈에 넣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 마음이, 아들을 향해 생긴다. 부모는 결코 아들의 부족함을 문제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론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나 역시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런 아들이었던 셈이다. 

 

아내와 아들이 생기고 나니,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어? 인생 별 것 있어? 까짓것 죽으면 그만이지. 두려울 때마다 혼잣말로 내뱉던 순간들이, 자식이 생기고 나자 사라져버렸다. 문득문득, 죽음이 두려워졌다. 

 

소방관, 119 구조대원은 인간이 살면서 가장 위험에 처한 순간들을 습관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였을까, [Resque]에는 죽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눈물이 나면서도 한 편으론 덤덤했다. 삶과 죽음이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구나, 생각하면서.

조기현은 형제 소방관이었다. 김규재는 13살, 11살짜리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났다. 변재우의 어머니는 1년 전에 남편을 잃고, 곧이어 딸도 심장마비로 죽었다. 변재우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며 통곡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따라 울었다. 『Resque 276』p, 김강윤, 리더북스

 

몇일 전, 길을 가다가 작은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는 119 구조대원분들을 만났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따뜻한 방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동안, 저들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음에 감사하며, 내일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남겨진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면서 말이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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