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준우 칼럼] '작게 보이는 것의 의미'

스타트업엔 2022. 5. 6.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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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의 장례식이 있었다. 세 살 터울 누나였다. 학창 시절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고, 평생 기구를 몸에 장착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어느 날,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수술을 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장례식장에서 펑펑 울었다. 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는 의외의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 사람들이 참 웃기고 답답하더라는 말과 함께.

“언니 이제 마흔을 넘겼어. 얼마나 좋은 나이야? 가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 간 거잖아.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은 척, 슬프지 않은 척 노력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 "젊은 나이에 투병하느라 고생 많았지. 이제 하늘나라 가면 아픔도 없고 기쁨만 있을 거야." 다들 이러고 앉아 있는 거야. 얼마나 우스워? 내가 우니까 그제야 북받쳐서 다들 우는 거야. 그냥 솔직하게 '슬프다, 힘들다, 소리 내서 엉엉 울고 싶다' 하면 될 건데, 왜 좋은 사람으로, 강한 사람으로 남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아등바등 울음을 참고 있는 걸까?”

 

언젠가 길을 가다가 경찰서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오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 되어 보였을까. 정말 어린아이였다. 그런데 옷차림은 초등학교 2, 3학년 아이의 옷차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빨갛게 염색한 머리, 스냅백, 허리춤에는 손수건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박스티에 조거 팬츠, 스니커즈. 20대 청년들이 입고 다닐 만한 스타일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아이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이끌리다시피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내 시야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 아이는 한 번도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도, 할머니의 손을 놓지도 않았다. 무척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껄렁해 보이는 스타일의 어린아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경찰서에서 나오던 아이, 나는 어쩌면 그 아이가 느꼈을지도 모를 두려움, 걱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SNS의 영향으로 이른 나이에 다양한 정보들을 접하게 된다'는 식의 틀에 박힌 결과는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이 몰라서 그렇지, 요즘 애들이 빨라.", "자식이 염색해달라고 하는데 부모가 안 해주고 배길 수 있어?" 하고 웃어넘겨버릴 만한 장면이었다면 그 장면이 뇌리에 그렇게 강하게 박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두렵거나 민망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과 기술이 어른에 비해 부족하다. 두렵거나 민망한 상황이 생기면 눈과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그때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러나 핏기가 가신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꽂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다. 주변에 철봉이 있다면 철봉에 매달리거나.

 

슈퍼마켓에서 몰래 과자 갖고 나오기, 약한 친구 괴롭히기, 치고받고 싸우기. 어린아이들이 주로 하는 나쁜 행동들이다. 아마 그 아이도 이런 나쁜 행동들을 통해 경찰서에 방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인도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경찰서에 방문하는 게 두렵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법의 잣대를 통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린아이라면 그 두려움은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고사리처럼 작았던 그 아이의 손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상상이다. 아무런 근거 없는 착각일 수도 있다. INFJ라는 성향에 걸맞게 별 것도 아닌 일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내 착각이 사실이라면, 그 아이의 두려움은 누가 보듬어주고 없애줄 것인가.

학창 시절에도 비슷한 친구들이 있었다. 노랗고 빨갛게 염색한 머리, 튀는 옷차림, 주머니에 꽂은 손, 껄렁한 태도. 어쩌면 그 나이대에서만 가능한 패션과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은 대부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가운데에서 성장한 친구들이었다. 부모님의 불화, 가정폭력, 이혼, 강압적인 부모님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었다. 그 당시에 비싼 옷과 비싼 운동화를 입고 다니던 친구들 대부분이 평탄하지 않은,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서,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두려움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잘못된 길을 선택했던 게 아니었을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추측해볼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커 보이고 싶어 한다. 나도 내가 가진 능력,  잘하는 것을 자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면의 나에게 속삭인다. '작게 보이도록 노력하라.'

 

크게 보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상당히 교만하며 함부로 말을 한다는 점에서, 작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사람을 얻을 수 있는 상당히 지혜로운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뛰어난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어낸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성공담을 쉽게 내비치지 않으며, 직설적이라는 표현 뒤에 숨어 함부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상대방보다 작아지고 낮아질 때 그 사람이 가진 내면의 깊이가 드러나는 법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 5명의 평균 연봉이 나의 연봉이다.

 

아마 한 번쯤 들어본 표현일 것이다. 매우 훌륭한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하나 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가 문제다. 보이스 피싱, 불법 도박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의 평균 연봉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해도 대기업 임직원과 비교해봤을 때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물론 저 말의 본 뜻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 5명이 가진 생각의 수준이 내가 하는 생각의 수준이며, 내면의 깊이다.

 

슬플 때 슬퍼하고, 힘들 때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어려울 때 어렵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 정말 큰 사람이 가진 내면의 자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무엇보다 생각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의 차이는 듣는 능력에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결과적으로 누구와 사귀고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생각이 큰 사람은 듣기를 독점하고, 생각이 작은 사람은 말하기를 독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크게 생각할수록 크게 이룬다」 162P, 데이비드 슈워츠, 나라 출판사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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