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전준우 칼럼] 협상의 품격 시리즈 '기회와 평등의 너머에 서서'

스타트업엔 2021. 5. 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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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가치

 

살아온 환경으로 말미암은 이념, 가치관, 서로가 추구하는 올바른 정의의 개념이 다른 경우에 사람들은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많은 문제를 겪는다. 2020년을 뜨겁게 달군 팬데믹 코로나 사태로 다양한 어려움과 문제가 공존한 가운데, 인종 혐오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도 불거지고 있다. 코로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는 순간까지, 코로나로 인한 인종간의 혐오와 갈등 문제는 우리가 겪는 숱한 문제들과 함께 끊임없이 부각되어질 골칫덩어리일 것이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는 흑인과 아시아인 사이에서 코로나라는 매개체가 인종간의 폭력이 벌어질 만큼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 않은가?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해 그들은 미국에 갔고, 정당한 방법으로 사업을 진행했으며, 시민권자 혹은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 가지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이 이민자로서, 혹은 시민권자로서 살고 있던 그 도시에 그들의 기거함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 일부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었고, 폭행을 휘둘렀으며(물론 폭행을 휘두른 것에 대한 대가를 받겠지만), 이는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인종간의 문제로 불거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국적이 무엇이던 지간에 꿈을 찾아 떠난 그들이 아시아인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 나은 결과를 찾기 위해서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이해

 

차이를 가치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들 중 의사소통의 이해가 있다. 의사소통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에 합당한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것을 함께 의미하지 않은가?

 

언젠가 필리핀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마무리 인사로 "fighting!"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고 반문했고, 나는 "한국에서 흔히 쓰는 마지막 인사"라고 이야기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지금 싸움이 일어나고 있어!"하고 마지막 인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확실히 재밌는,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예다.

아프리카의 유럽이라고 불리는 남아공에서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sharp, sharp"이라고 인사한다. 'What's up?'이나 'How are you?'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표현이며,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친근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한국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길을 가다가 눈이 마주친, 혹은 외길에서 마주친 사람에게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인사하거나 '별 일 없으세요?'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큰 오해를 살 수 있는 일이다.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관념을 갖고 살아간다.

 

다행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먼 나라 사람들과 언어로 인한 의사소통의 부재는 google translator와 grammarly, 음성인식 프로그램인 Speech to text를 활용해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타갈로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더라도 구글을 활용해서 어느 정도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코로나 이전 10개국 이상 국가를 방문하며 다양한 활동을 경험해본 덕분에 나의 페이스북 친구는 한국 사람들보다 외국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데, 어느 누구와 이야기해도 의사소통에 문제를 겪지 않는다. 심지어 몇 시간 동안 장문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먼 나라 이웃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의 부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보다 내 주위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소통 단절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잘 아는 어느 분은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늘 술에 취해서 집에 오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회사에 다니셨는데 집에 도착하면 늘 엑셀레이터를 최대로 밟아서 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시동을 끄던 아버지였다고 이야기했다.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곤히 자는 아들딸을 깨워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훈계를 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25살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어느 날,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시며 "복학했으니 용돈이 필요할 텐데, 필요할 때 쓰거라."하고 이야기하셨다.

 

"아들아! 딸아! 아버지가 왔어! 아버지가 오늘 회사에서 너무 힘들었어."


"얘들아! 아버지 이야기를 좀 들어줘! 나는 오늘 정말 즐거운 하루를 보냈어!"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는 마을이 떠나가라 오토바이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이전에 흘려본 적 없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이야기한 그 분은 아버지와 나누지 못한 수많은 대화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협상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마는, 여기 성공적으로 아들과의 협상을 이루어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막을 함께 여행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길을 잃어서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헤매고 있었고, 아들의 마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누구도 아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을 빼내줄 수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아버지! 우리는 이 사막에서 죽을 거예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대답은 달랐다. "아니야 아들아! 우리는 살 수 있어. 아버지도 힘들지만, 사막에서 힘들다고 쓰러지면 안 돼. 우리는 반드시 길을 찾을 거야!"

 

아들의 마음에는 그 어떤 소망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조금 더 힘을 내서 걸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아들은 다시 힘을 잃고 쓰러졌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이야기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가겠어요. 여기에서 우린 죽는가 봅니다. 이제는 방법이 없어요."


"아니야 아들아! 아버지는 전에도 이 길을 와 본 적이 있단다. 우린 지금 동쪽으로 가고 있어. 가다 보면 반드시 마을이 나올 거란다."

 

"아버지! 마을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어제도 하셨잖아요. 하지만 마을을 찾지 못했어요. 마을이 정말 있기는 한 건가요? 전에 이곳에 와보셨다는 말씀도 거짓말이죠?"

 

"아니야! 아버지는 이 길을 와 본 적이 있단다. 분명 머지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 아버지의 마음에는 소망이 있단다. 힘을 내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금 힘을 내서 걷던 아들은, 그러나 얼마 못가 완전히 주저앉고 말았다. 아들의 눈앞에는 누군가의 무덤이 있었고,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아들은 펑펑 울며 아버지를 향해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버지! 저기 보세요! 누군가의 무덤이 있어요. 우리도 저렇게 죽을거에요! 저건 사람의 무덤이잖아요!"

 

절규하는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들아! 사람이 죽은 건 맞아. 그런데 그 사람이 혼자 무덤을 파고 들어가서 죽었겠니? 저기 무덤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묻은 사람이 있다는 거야. 이 근처엔 마을이 있다는 말이지. 우린 이제 살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아들은 마을을 발견했고, 그들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올바른 의사소통을 통하여 마음의 힘을 흘려주는 것과 같다. 올바른 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진 신뢰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물결을 형성하고, 그 물결은 거대한 파도처럼 마음에 흘러 들어와서 전에 없던 소망을 만든다. 모든 협상은 소망의 흐름이며, 믿음의 형성이다. 이 법칙을 벗어나는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사진=전준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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